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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문헌 목록 〉6. 6世 〉15. <부정공>춘추향축문(春秋享祝文)휘숭문(諱崇文)
1. 문헌 목록 〉6. 6世 〉17. <부정공>절민공신도비명(節愍公神道碑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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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6.<부정공>가선대부함길도병마절도사증자헌대부병조판서겸오위도총부도총관시절민공시장(嘉善大夫咸吉道兵馬節度使贈資憲大夫兵曹判書兼五衛都摠府都摠管諡節愍公諡狀)
嘉善大夫咸吉道兵馬節度使贈資憲大夫兵曹判書兼五衛都摠府都摠管諡節愍公諡狀 謹行制度曰使民悲傷曰愍 咸吉道兵馬節度使特贈兵曹判書趙公諱崇文 端宗朝忠臣也 上之九年癸卯夏禮曹判書臣朴晦壽因多士上言覆啓言忠節 贈秩在典應諡上可之其後孫基中踵門乞狀欲以固太常此聖朝美典也其義有不容辭而距公立殣之時四百年公私文蹟蕩然無存其何以徵信於生卒踐歷名義事功之實乎雖然臣寅永謹按 正宗御題弘齋全書第六十卷莊陵配食錄首列正壇三十二人次列別壇二百三十六人而第七十二人即兵使趙崇文其次趙哲山崇文子也下附按説曰按説曰按文獻備考兵使趙崇文高麗忠臣瑜子也丙子與子哲山並死並享順天謙川祠春官爼豆簿謙川鄉賢祠享高麗副正趙瑜配節度使趙崇文士人趙哲山昌寧成氏族譜成勝妹婿趙崇文淳昌人丙子父子被禍淳昌趙氏家譜 世宗朝崇文武科 上王遜位引疾退居父子輒相對涕泣丙子與妻兄成勝勝子三間及朴彭年等被禍據此則崇文之於成勝如奉汝諧之於朴彭年既是密戚理無獨免且其引病退居相對涕泣蹟之優異父子同然而但實錄招魂記其名不見耳予己亥嘗命旌閭享祠可驗遺誦棹楔業施表章雖無國乗之確考亦有諸書之可據徑刊恐歸太苛並錄不害存疑仍列三聘諸人之下以見其所由坐焉於此有以仰 正廟微顯闡幽之至意而大聖人金枰玉尺可質百世則借使啓石室之秘笈搜草澤之逸史豈能有加於此哉公字武伯狀稱玉川人玉川今淳昌也五世祖諱璋始顯於麗官檢校大將軍再傳而有諱佺文科追封玉川府院君生諱元吉文科檢校門下侍中策勳玉川府院君生諱瑜文科官副正麗氏之季喪禮大壤惟公與圃隱鄭先生廬墓終三年冶隱吉先生作傳以美之及鼎革遯順天之謙川我朝累徵以官竟不出 世宗旌之曰孝子前副正趙瑜之閭盖並褒其忠也配潭陽鞠氏生二子公其第二也嘗於北邊禦野人有功及丙子六臣謀復上王事泄公父子亦被逮時吿密人鄭昌孫金礩等與公有舊欲其生以微辭諷之公張目大言曰生平罵食人食而忘其恩曾犬豕不若歸見謹甫足矣謹甫三問字也顧謂哲山曰爾亦見爾父於地下無怍顔也配昌寧成氏判中樞府事襄惠公達生女也男哲山從公而死 贈公時亦 贈童蒙敎官二女適呉信孫金日躋哲山男瓊坐謫久而後得釋自廢以終至宣廟年間始有丙子被禍人子孫存錄之命公之四代孫愷愷之從弟信及倫除寝郎云家狀所載槩如此寅永又按襄惠公實吾宗石磵公云仡姪女婿公於豊壤之趙爲彌甥故父子殉節事悉載寅永世譜亦一確證也嗚呼丙子之事當以成氏爲主而公即成氏之托婿姻者也死生禍福初無異同勢也非特同其義也昔者皇朝方正學之死株連及於十族况公之於成氏乎竊謂公生於忠孝之門平素擩染厥有本而當 世宗朝英才輩出之際六鎭開拓之餘任之以北方捍禦則其材武勇略傑然爲當時偉人與成忠肅兪忠穆諸公固等耳然則公所以節惠者宜有不易之論矣 豊壤 趙寅永 撰 領議政 雲石 가선대부함길도병마절도사증자헌대부병조판서겸오위도총부도총관시절민공시상 행실을 삼가 제도(制度)하는 것을 절(節)이라 하고 백성들이 슬퍼하는 것을 민(愍)이라 한다. 함길도 병마절도사 특증(特贈) 병조판서 조공(趙公) 휘 숭문(崇文)은 단종때 충신이다. 금상(今上:지금의 임금) 九년 계묘( )에 예조판서 신(臣) 박회수(朴晦壽)는 선비들의 상언(上言)에 의하여 복계(覆啓)하여 그 충절(忠節)에 대하여 벼슬을 증직하고 법에 따라 시호 내리기를 청하였더니, 임금께서 옳다고 하셨다. 그 후에 그 후손 기중(基中)이 집에 찾아와 시장(諡狀)을 청하여 태상사(太常寺)에 바치려 하니, 이는 성조(聖朝)의 아름다운 은전이다. 이에 의리로 보아 사양할 수 없다. 그러나 공이 절의를 세운 지 이제 거의 四백 년이나 되어, 공사간의 문적이 모두 없어져 남아 있지 않으니, 어떻게 그의 생졸 연대와 이력, 명의(名義), 사공 등의 사실을 고증할 수 있겠는가? 비록 그렇다 하나, 신(臣) 인영(寅永)이 삼가 살펴보건대 정조(正祖)께서 지으신 「홍재전서(弘齋全書)」 제六十권에 장릉배식록(莊陵配食錄)이 있는데, 첫째 줄 정단(正壇)에 三十二명이 나열되고 별단(別壇)에 二백三十六명이 나열되어 있는데, 그 중 七十二번째가 바로 병사(兵使) 조숭문(趙崇文)이며, 그 다음이 조철사. (趙哲山)으로 숭문의 아들이다. 아래에 상고한 설(説)을 붙이면 다음과 같다. 「문헌비고(文獻備考)」를 살펴보면, 『병사 조숭문은 고려 충신 유(瑜)의 아들이다. 병자년에 그의 아들 철산과 함께 죽어 순천 겸천사에 같이 향사되었다.』 하였고 「춘관조두부(春官爼豆簿)」에는, 『겸천 향현사(鄉賢祠)에는 고려 부정 조유를 향사하는데, 절도사 조숭문과 사인(士 人) 조철산을 배향하였다.』 하였다. 창녕성씨(昌寧成氏) 족보에는, 『성승(成勝)의 매서(妹婿) 조숭문으로 순창인이다. 병자년에 부자가 함께 화를 당하였다.』 하였고, 「순창조씨가보(淳昌趙氏家譜)」에는 『세종때 숭문은 무과에 급제하여 상왕(上王:단종)이 왕위에서 물러나자, 병을 핑계 하여 벼슬에서 물러나 부자가 서로 얼굴을 맞대고 울었다. 병자년에 처남 성승과 그의 아들 성삼문(成三問) 및 박팽년(朴彭年) 등과 함께 화를 입었다.』 하였다. 이상에 의거하면 조숭문과 성승은 마치 봉여해(奉如諧)와 박팽년의 사이처럼 가까운 친척이어서 홀로 화를 면하지 못하였을 것이다. 다만 벼슬에서 물러나 마주보고 운 행적만이 다르다. 부자가 함께 그랬는데, 다만 「실록(實錄)」 초혼기(招魂記)에는 그들 이름이 보이지 않는다. 내가 기해년(一七七九)에 일찍이 정려(旌閭)를 명하고, 제사하게 한 것을 증험한 것 이다. 비록 나라의 역사(歷史)에 확실한 증거는 없으나, 여러 책에서 상고할 만 하므로 바로 끊으면 너무 가혹할 것 같고 함께 기록해도 해가 되지 않을 듯하였다. 그래서 삼빙(三聘)의 여러 사람 밑에 두어 그 이유를 알게 한 것이다. 이어져 정조(正祖)께서 은미한 것을 드러낸 지극한 뜻을 알 수 있고 대성인(大聖人)의 공평한 평가를 백세에 질정(質正)해도 좋을 것이다. 가령 석실(石室)에 소장된 비서(秘書)를 열어보고 초야에 묻힌 일사(逸史)를 찾아보더라도 어찌 이보다 더 할 수 있겠는가? 공의 자(字)는 무백(武伯)인데, 행장에 옥천인이라 칭하였으니, 옥천은 지금의 순창 이다. 五세조의 휘는 장(璋)으로 고려때 처음으로 현달하여 벼슬이 검교대장군이다. 재전(再傳)하여 휘 전(佺)은 문과에 급제하여, 옥천부원군에 추봉되었는데, 휘 원길 (元吉)을 낳았다. 원길은 문과에 급제하여 검교문하시중으로 옥천부원군에 책훈되었다. 이 분이 휘 유(瑜)를 낳았는데 문과에 급제하야 벼슬이 부정이었는데, 고려말 상례 (喪禮)가 크게 어지러웠으나, 오직 공과 포은 정몽주 선생만이 여묘 三년을 살았기 때문에 야은 길재 선생이 전(傳)을 지어 아름답게 여겼다. 고려가 망하고 조선이 서자 순천 겸천에 숨었는데 조선에서 여러 차례 벼슬로 불렀으나 끝내 나오지 않았다. 세종이 「효자전부정조유지려」라는 정려를 내렸으니, 이는 그의 충성을 표창한 것이다. 배(配) 담양국씨(潭陽鞠氏)가 두 아들을 낳았는데 공은 둘째이다. 일찍이 북쪽 변방 에서 야인(野人)을 막는데 공을 세웠는데, 병자년에 이르러 사육신과 함께 상왕(단종) 을 복위시키려 모의하다가, 일이 누설되어 공의 부자가 역시 체포되었다. 그때에 밀고한 정창손(鄭昌孫)·김질(金礩) 등은 공과 친하여 살리려고 은근히 알려주었다. 그러자 공은 눈을 부릅뜨고 큰 소리로, 『평생토록 사람의 밥을 먹은 자가 은혜를 잊는다면, 개나 돼지보다 못하다. 돌아가 근보(謹甫)를 본다면 만족하다』 하고 외쳤는데, 근보란 성삼문의 자(字)이다. 그리고는 아들 철산을 돌아보면서, 『너도 애비를 지하에서 만날 때 부끄럽지 않도록 하거라.』 하였다. 배 창녕성씨는 판중추부사(判中樞府事) 양혜공(襄惠公) 달생(達生)의 딸이다. 아들 철산은 공을 따라 죽었는데, 공을 증직할 때 동몽교관(童蒙敎官)에 증직되었다. 두 딸은 오신손(呉信孫)과 김일제(金日躋)에게 각각 출가하였다. 철산의 아들 경(瓊)은 오랫동안 귀양살이를 하다가 풀려났으나, 폐인임을 자처하다 생을 마쳤다. 그러다가 선조(宣祖)때에야 비로소 병자년 화를 입은 사람의 자손을 기용하라 하였는데, 공의 四대손 개(愷)와 개의 종제 신(信)·윤(倫)이 참봉(參奉)에 임명되었다. 가장(家狀)에 기록된 것이 대량 이상과 같은데, 나 인영(寅永)이 다시 상고하건데, 양혜공은 실로 우리 종(宗)의 석간(石磵) 조운흘(趙云仡) 공의 질녀서이다. 그러므로, 공과 풍양조씨(豊壤趙氏)는 미생(彌甥)인 까닭에 부자가 함께 순절했다는 사실이 인영의 세보(世譜)에도 실려 있어 더욱 확실한 증거가 된다. 아! 병자년의 일은 성씨가 주동이 되었는데, 공은 성씨와 혼인한 사이였다. 그러니 죽고 사는 것과 화와 복이 처음부터 함께 하지 않을 수 없는 형세였지, 비단 그 의리만 같았던 게 아니다. 옛날 중국에서 방정학(方正學)이 죽을 때 十족(族)이 연좌되었는데, 더군다나 공과 성 씨들 사이이겠는가? 공은 충효의 집안에서 태어나 평소 거기에 물들었으니, 근본이 있는 것이 당연하다. 세종 때 영재(英才)를 배출했고, 六鎭을 개척했는데, 공을 북방에 임명하여 오랑캐를 막도록 했으니, 그의 무재(武才)와 용략(勇略)이 우뚝하여 당시의 위인인 것이 성충숙(成忠肅:성승)·유충목(兪忠穆:유응부) 제공과 본디 같았던 것이다. 그러니 그의 절혜(節惠)는 바꿀 수 없는 논의인 것이다. 풍양(豊壤) 조인영(趙寅永) 지음 註:장릉별단(莊陵別壇):강원도 영월군(寧越郡) 군내면郡内面) 영흥리(永興里)에 있는 단종(端宗)의 릉에 있는 단. 조인영(趙寅永 一七八二∼一八五O):본관은 풍양(豊壤) 호는 운석(雲石) 一八一九년 식년문과(式年文科)에 장원. 一八三五년 이조판서가 되는 등 많은 벼슬을 역임. 풍양조씨의 중심인물이 되어 안동김씨와 맞서고 一八三五년 기해박해를 일으켜 천주교를 탄압. 죽을 때까지 四차례나 영의정을 역임하였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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